어김없이 돌아온 글쓰기 주간. 이번엔 무슨 문화 리뷰를 써볼까 싶었다. 요즘처럼 드라마 라인업이 빵빵한 시기도 잘 없겠지만서도 시간을 내어 영상을 보기엔 눈에 피로감이 찼다. 새로운 서사는 보고 싶은데 뭔가의 영상을 더 접하기엔 머리가 어지러웠던 시기. 나는 드라마 말고 드라마 대본집을 읽어보기로 했다.
예전엔 드라마 하나가 히트치면 그 작품의 캡쳐본 만화가 새로이 나온다든가, 소설판이 나온다든가 하는 시류가 유행이었는데 요즘은 조금 다른 것 같다. 드라마 한 편이 잘 되고 나면 드라마에 열광했던 이들이 모여 '블루레이'와 '대본집'을 발매를 외치곤 하고 보통 그 화력이 일정 수치를 넘었을 경우 제작사에서 또한 응해주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이름하여 '소장본'의 시대인 것이다.
더 없는 OTT 시대 어플을 켰다 하면 영상 클립 저장하는 것 정돈 일도 아닌 이 시대에 사람들은 손에 쥐고 만질 수 있는 실물에 더 열광한다. '봄'의 형태 말고도 아무나 가질 수 없는 한정판, 특별판의 형태를 쥐면 '보기'의 형태만으론 알 수 없었던 또 다른 활자의 세계가 열리기 때문일까. 사실 나 또한 그 매력에 빠져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드라마의 대본집을 읽어보며, '아 사람들이 이래서 직접 만질 수 있는 활자에 대해 이리도 열광하는구나'를 몸소 체험했다.
누가 나에게 인생드라마를 꼽으라 한다면 나는 내가 봐온 많고 많은 작품들 중 <스토브리그>를 꼭 든다. 야구의 야 자도 모르고 그 흔한 직관조차 가본 적이 없었지만 만년 꼴지팀의 단장이 그것도 야구 비시즌이라는 겨울에 벌인 그 사건들이 어찌나 재밌었던지 같은 장면만 한 10번 정도 돌려본 것 같다. 일년의 주기를 끝내고 돌아온 주인공 ‘백단장’의 뒷모습을 마지막으로 그 드라마의 막방이 아른거려 시즌 2 무새가 되어버린 나는 결국 스토브리그 대본집까지 펴들기에 이르렀다.
이야기를 만드는 작업은 즐겁지만 어려웠습니다.
저는 참 약한 사람이었지만 그래도 괜찮았습니다.
우리 팀은 서로를 도왔습니다.
서툰 제 첫걸음을 지켜봐주셔서 감사합니다.
2019. 02.
이신화 드림
그렇지. 책을 편 첫장부터 보이는 작가님의 글씨에 절로 고개를 끄덕였다. 글 하나에도 메이킹 현장 영상에서도 볼 수 없었던 현장감이 느껴진다. 바로 인물 소개란에 빼곡히 들어찬 캐릭터 전사를 확인해본다. 야구를 알지 못하더라도 야구팀 하나를 위해 논리를 전개하고 치열한 수를 쓰는 캐릭터 백단장 뒤에 무슨 사연과 다짐이 있는지를 활자로 확인해보는 일은 배우의 연기를 감상하는 것과 꽤 다른 온도차를 가지는 것 같다.
그리고 가장 좋아하는 2화의 장면.
주인공 백승수 단장이 드림즈라는 팀에 들어와 두번째로 벌인 개혁이자 가장 큰 승부수였던 임동규와 강두기 트레이드 장면. 지금 내가 무슨 장면을 이야기하고 있는지 못 알아들어도 상관없다. 꼭 야구의 이면을 세세하게 알지 못하더라도 그 드라마가 좋을 수 있었던 이유는 따로 있었기 때문에.
한 팀의 우승을 위해 한 남자가 벌이는 싸움은 치밀하다. 드라마를 보며 익히 알아온 사실이긴 하지만 사실 이 인물의 치밀함을 대놓고 드러내지 않으려는 대본집은 촘촘하다 못해 빽빽했다. 승수는 야구팀을 승리시키기 위해 내놓은 패를 줄줄이 읊는 법이 없다. 백승수는 정말이지 자주 '단언'한다. 단언하기 직전까지 물밑에서 어떤 폭풍이 일으키는지 드러내지 않고 고요하게 강한 인물이 정말 그다.
그로 말미암아 자기가 세운 전략과 논리에 대해서만 얘기한다. 인물이 필요한 대사만을 치게 하기 위해 <스토브리그>에선 인물과 인물 사이의 대사 주고받기에 전력하는 것 같다. 야구 팀에 얽혀있는 이해관계에 따라 어떤 이는 백승수에게 화를 내고 어떤 이는 백승수에게 활짝 웃어보이지만 그 모든 대화와 감정선을 타고 흐르는 백승수의 대사는 한 두 줄을 넘어가는 일이 잘 없다. 간결하고 명료한. 나는 이 향연이 특히나 더 좋았던 것 같다.
“변화는 필요합니다. 임동규 선수 대신에 강두기 선수가 왔습니다.
조금이라도 팀에 도움이 되는 일이면 저는 할 겁니다.
조금이라도 팀에 해가 된다면 도려내겠습니다.
해오던 것들을 하면서… 한 했던 것들을 할 겁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드라마 대본집을 읽으면서 외려 드라마를 더 심도있게 읽는 이 기분. 분명 드라마 영상으로만 붙잡을 수 없었던 지문이며, 대사에 찍힌 온점 위치며 인물 소개의 툭툭 던져지는 한 두 문장까지 디테일들이 모여 서사를 살아숨쉬게 하는 것이 틀림 없을 것이다.
드라마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분명 드라마 대본집을 사랑할 수밖에 없구나. 다들 그토록 소장본에 왜 이리도 열광했는지 꼬박 대본 2권을 읽어가며 느꼈다. 백승수의 툭툭 던지는 그 무심한 말들이 정말 대본 두 줄을 넘어가지를 않는지 (물론 상황에 따라 두 줄을 가뿐히 넘기는 장면 또한 있었찌만) 헤아리는 것이 어디 보통 일인가. 드라마 대본집 읽기는 드라마 보기와는 또 다른 기쁨을 숨기고 있었다. 핸드폰만 키면 영상에 눈꺼풀이 무거워지고 밀려들어오는 잡생각에 피곤해진 사람이라면 이 여름 드라마 대본집 완독을 새로운 취미로 추천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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