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궁금증이 생겼다. 노래를 부르는 이들의 글은 뭔가 좀 다를까. 이런 궁금증을 유발하게 한 건 요즘 부쩍 베스트셀러에 올라가있었던 가수들의 저서 이름들을 발견한 이후부터였다. 양희은의 <그러라 그래>, 유희열의 <밤을 걷는 밤>, 이찬혁의 <물 만난 물고기>.
각기 이름을 알린 시기와 각기 지닌 장르는 조금씩 다를지라도 내가 좋아하는 가삿말을 읊는 이들이 쓴 글들이 나는 궁금해진 것 같다. 그래서 세 권을 내리 읽어보기로 했다. 생각보다 힘에 부치지 않았고 글을 읽는 내내 오랜만에 즐거웠다. 내가 가진 고민들과 영감들에 기대어 편하게 읽을 수 있는 세 권의 책이 있었던 덕분인 것 같다.
인생이 내게 베푼 모든 실패와 어려움,
내가 한 실수와 결례, 철없던 시행착오도 다 고맙습니다.
그 덕에 마음 자리가 조금 넓어졌으니까요.
무대에서 뵐 때까지 제발 강건히 버텨주세요.
내 또래 나이에, 양희은의 노래가 친숙하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대신에 내게 양희은은, 어릴 적 아침 9시마다 틀어놓던 라디오 <여성시대>의 매일같이 들려오던 DJ의 목소리로 더 친근했다
초등학생 때, 라디오의 주된 연령대의 진득한 삶이 담겨있는 사연을 멋도 모르고 잘도 들었다. 사연을 들려줄 때마다 구구절절 사연 한 줄 한 줄 읽어가며 결국 목이 메여오던 양희은의 목소리. 나는 성인이 되었고, <그러라 그래> 속 담겨있는 양희은 스스로가 이야기하는 구구절절한 '사연들'을 다시 마주하며 자꾸만 그 목소리가 떠올랐다.
서른이 되고 싶었다. 서른이면 두 발을 땅에 딱 딛고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막상 서른이 되어도 달라진 건 없었다.
흔들림은 여전했다.
하지만 10대나 20대와는 다르게, 나에 대해 조금은 알 것 같은 기분?
세월만큼 버티고 선 느낌이랄까?
세상사 다 똑같다 하던가. 옛 노래 속에 담긴 이별 사연이 지금 와서도 사무치듯 자신의 2030 시절을 이야기하는 양희은에게서 자꾸만 요즘의 내가 보였다.
요즘 나는 자꾸만 ‘서른’이라는 나이가 주는 무게와 기대에 휩싸이려 노력했던 것만 같다. 그보다는 어리지만 뭣하나 커리어로 보나 무엇 하나 제대로 이루지 못한 것은 아닌가 하고. 그런 나에게 양희은이 과거를 회고하며 툭툭 던지는 말은 사실은 냉정한 구석도 있었다. 살아보면 별 거 아니고 결국엔 어느 나이에나 사는 건 똑같고 어렵다고.
어떤 나이든 간에 죽음 앞에서는 모두 절정이라 치면, 그래.
지금이 내 삶의 절정이고 꽃이다.
인생의 꽃이 다 피고 또 지고 난 후라 더 이상 꽃구경은 없는 줄 알았다.
그런데 생각을 바꾸니 지금이 가장 찬란한 때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희은의 글이 따뜻했던 건, 그때나 지금이나 자신에게 여전한 ‘삶의 흔들림’을 얘기하기 때문은 아니었나 싶다. 양희은은 어릴 적 자신의 불우했던 가난이나, 그 가난에 빚진 사람들의 친절이나, 혹은 느닷없이 당한 배신들에 대해 감정을 이입하며 글을 쓴다. 이왕이면 삶에서 가장 깊은 굴곡을 만들고 싶었다는 말이 지금의 불안한 나에게 조금 더 용기를 불어넣어주는 듯했다.
앞서 리뷰한 양희은의 <그러라 그래>가 자신의 과거를 회고하는 글이었다면, <밤을 걷는 밤>은 가수 유희열이 서울 곳곳을 산책하듯 자신의 기억을 누비는 글이었다. 실제 책 속에 삽입되어 있는 서울의 모습을 딴 지도와 사진은 정말이지 딱 지금 이 여름밤에 저자를 옆에 두고 어슬렁 어슬렁 걸어가는 상상을 자극한다.
한때는 다들 이런 얘기를 했다.
압구정 로데오는 끝났다.
나는 그 말이 못내 슬펐다.
아무도 없는 테마파크를 상상하면 서글픈 것처럼.
나에게 압구정 로데오는 ‘청춘의 테마파크’와 다름 없다.
유희열 역시 자신의 젊은 시절과 얽히고 섥힌 장소 주변을 걸어다니며 자신의 기억을 회고한다.그럼에도 유희열이 쓰는 ‘그땐 그랬지’가 질리지 않는 이유는 특정 도심에 얽힌 자신의 추억과 기억을 가감없이 내보여주기 때문이 아닐까 싶었다.
형, 누나들과 어울렸던 술집이든, 어릴 적 퇴근하고 돌아오는 어머니가 서계셨던 정류장이든 장소에는 좋은 기억과 더불어 씁쓸함, 조바심, 호기심 등 어떤 복합적인 감정들이 눙쳐있다. 그걸 솔직하게 쓰고 읽을 수 있는 책이 바로 <밤을 걷는 밤>이었고, 나는 책을 읽으며 왠지 당장에 내가 닥친 고민거리들에게서 한발짝 물러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엄청 오래된 슈퍼 앞에도 평상은 놓여 있었다.
잠깐 앉아도 되냐고 묻자 할아버지는
여전히 데면데면한 투로 말씀하셧다.
‘마음대로 앉으쇼. 무기한 앉으쇼.’
‘무기한’ 대여한 국민수퍼 앞 평상에 한동안 앉아 있었다.
요즘에는 부쩍 귀해진 전봇대가 눈에 들어왔다.
평소에 걷는 걸 좋아하는지라, 퇴근하고도 대중교통으로 익숙한 길을 가끔 집까지 걸어서 가곤 하는데 내가 가진 이 서울 안에서의 동선을 책과 함께 자꾸 견줄 수 있어 재밌었다. 아 걷다가 앉아서 쉴 수도 있구나. 혹은 어떤 이에게 말을 붙여볼 수도 있겠구나. 내가 가진 한 가지로 난 길이 유희열의 자취를 따라 자꾸만 넓어지는 게 나는 참 좋았던 것 같다.
지금 읽었던 세 권의 책 중에서, 노래 제목으로 가장 친숙한 책으로 시작했지만 가장 난해한 책으로 끝나버린, <물 만난 물고기>. 에세이가 아닌 소설이었고, 작가가 묘사하는 두 남녀는 꼭 이 세상 사람이 아닌 듯 땅 위에서 연신 날아다니며 사랑을 하더랬다. 그리고 소설은 자신의 사랑을 음악으로 담으려고 하는 남자의 이야기로 문을 연다.
그들이 나의 이야기를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
그들이 알아야만 그들의 연주를 통해 모든 것이 완성될 것이다.
나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주인공 '선'과 '해야'가 누비는 공간은 앞서 소개한 두 책과 다르게 구체적이거나 이성적인 공간이 아니었다. 작가인 이찬혁은 바다이기도 하고, 갈대밭이기도 한 이제 막 사랑에 빠진 연인인 둘만의 공간을 마음껏 펼쳐보인다. 그래서 그 공간을 누비는 주인공들 또한 꼭 실체가 있는 사람이기 보다 누군가의 기억이기도, 혹은 환영이나 일순 지나가는 감정 같기도 하다. 그래서일까. 두 인물이 나누는 대화도 실제 사건에 입각하기 보단 그들 머릿속에서 튀어나온 상상을 기반으로 이루어진다.
예술가, 그게 어떤 건데?
진정한 예술가는 자기가 한 말을 지키는 사람이야
그래서일까. 어떤 이에겐 천둥벌거숭이와도 같은 두 주인공들의 이야기가 하늘에서 맥락없이 뚝 떨어진 대화처럼 느껴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이 책을 읽으며 스스로에게 이해를 물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문득, 그냥 머릿속에 떠돌아다니는 잡생각이 정말 발이 달리고 손을 뻗어 선과 해야가 되었다면, 그들이 움직이는대로 말하는대로 나는 이해 없이 그저 받아들이면 그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결국엔 예술이고 영감이니, 조금은 더 자유롭게 나 자신을 풀어도 된다는 생각. 나는 그걸 <물 만난 물고기>에서 찾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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