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지는 송은이의 팬이다. 누군가 개그우먼의 팬임을 자처했을 때 보통은 그가 나온 프로그램을 챙겨보며 개그를 즐기겠지. 그에 반해 송은이를 덕질하는 경우는 조금 유별나다. 그가 나오는 프로그램들을 본다는 건 개그우먼으로서의 송은이를 보는 일이기도 하지만, 못지 않게 훌륭한 프로그램 제작자로서의 송은이를 보는 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승승장구하던 그는 이번에도 예능 프로그램 하나를 기획했고 이번에도 여지없이 인기와 화제성을 몰고 왔다. 나 또한 이번에도 기꺼운 마음으로 팟캐스트를 틀었고 또 어느 순간 취향을 저격당한 한 사람이 되어있더라. 바로 2020년 8월부터 업로드 되고있는 팟캐스트 '송은이 장항준의 씨네마운틴’의 이야기다.
대학시절부터 지금까지 연을 이어오고 있는 개그우먼 송은이와 감독 장항준이 뭉쳤다. 오직 영화 얘기를 하기 위해. 두 패널의 말마따나 영화라는 산봉우리를 오르기 위해서 말이다.
그런데 이 팟캐스트 가만 듣고 있음 좀 웃기다. 영화 얘길 하자고 앉은 그 자리에서 진득한 토론이나 리뷰는 커녕 ‘썰을 푼다’. 이 오랜 친구들은 지인, 가족과의 사담부터 시작해 어린시절 겪은 황당무개한 사건, 영화계에 몸담으며 겪은 술자리, 심지어 어제 전화 온 배우와의 수다내용까지 낱낱이 ‘털어낸다’. 영화 얘기를 하다가도 그 둘은 사적인 토크나 퍼뜩 떠오른 “딴 얘기’로 곧잘 샌다.
영화 얘길 아예 안 하는 건 아닌데 그렇다고 영화 얘기만 하는 것도 아닌 이 요상스러운 영화 프로그램은 아예 당당하게 자신들의 목적은 정상이 아니라고 선언한다. 1부가 열리며 송은이가 낭독하는 인트로 속 ‘입등반’이 바로 그것이다.
입으로 하는 거? 보통 얄미운 행동을 일컬어 쓰지 않나. 본인은 제대로 본전에 발도 담그지 않은 채 입으 로 이러쿵 저러쿵 하는 본새를 두고 “입만 살았다”고들 한다. 그런데 이 프로그램의 입등반은 좀 다르다.
정상 말고. 그냥 우리 다같이 즐거웁자고 얘기하는 바로 그런 대화. 얄밉기는커녕 장항준이 입을 열어 썰을 풀수록, 송은이가 입을 벌려 웃을수록 얘기가 산다.
어찌 보면 이 프로그램이 지향하는 바는 A급이기 보다 B급이고, 이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 흐르듯 흘러가는 이야기에 홀린 듯이 웃게 된다. 썰 푸는 와중에 주는 교훈도 있다. 듣던 나까지 무릎을 탁 치며 귀 기울이게 되는 영감의 순간들도 존재한다. 이 오랜 두 친구의 대담이, 나는 너무나도 재밌다. 왜였을까?
<씨네 마운틴>에서 가장 재밌었던 에피소드를 꼽자면 나는 단연 1화다. 그렇다고 1화만 재밌단 얘긴 아니지만. 꼭 한 번 들어보시라, 1화가 재밌다. <영웅본색>이라는 영화사에 한 획을 그은 명작을 앞에 두고 장항준 감독이 자신의 친구 ‘용식씨’ 얘길 꺼낸다. 뭐야 영화 얘긴 안 하고 무슨 친구 얘기?
처음엔 이게 무슨 얘기야 싶다. 그 때 그 시절 친구 얘길 하며 장항준과 송은이가 꺼내드는 것은 다름 아닌 <영웅본색>이 개봉한 당시의 에피소드들이다. 그것도 세월을 정면으로 거쳐간 본인들의 경험들 말이다.
그야말로 직접 겪은. 멀티플렉스가 뭐야 그 당시 서울에 즐비했던 단성사, 명보극장, 피카디리 같은 극장들 중 어디서 영화를 함께 보았는지,<영웅본색>을 본 젊은 남자들이 긴 기장의 코트를 따라 입곤 했는지. <영웅본색>을 본 어린 장항준이 어떻게 첫 습작을 써내려가기 시작했는지. 그러면서 당대 시대를 풍미했던 홍콩영화가 어찌나 대단했고 그 사이에 우뚝 선 <영웅본색>이 우리에게 어떤 기억으로 자리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말이다.
장항준과 송은이는 그저 열심히 그 시대로의 향수를 불 지펴줄 뿐인데 두 친구가 맞장구 치는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그냥 듣던 나도 숨넘어가게 웃고 있다. 안 겪어봐서 모르는 얘기가 아니라 지금 겪는 것처럼 생생하게 맞장구 치는, 순전히 두 친구의 대화 덕분이다.
어느 에피소드에서 그가 밝혔듯이, 장항준은 물 흘러가듯 보였던 썰들을 철저하게 준비해오는 편이다. 영화 주제에 입각한 에피소드부터 약간은 썰렁한 말장난까지 대본 뒷장에 빽빽히 써가면 거기에 맞장구 쳐주는 건 바로 송은이다.
송은이는 웃긴 얘기에 폭소하거나, 썰렁한 농담에는 얄짤없는 피드백을 준다. 큰 스튜디오 토크쇼의 편집기술이나 호스트 대 게스트로 만난 어색한 공기였다면 불가능했을, 그야말로 즉각적인 완급조절은 어쩌면 오랜 세월 장감독을 옆에서 지켜봐온 송은이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장항준이 썰을 좋아하는만큼 송은이는 노래 부르기를 좋아한다. 장항준의 썰로 하여금 생각나거나, 것도 아니면 느닷없이 상황에 맞게 치고 들어오는 송은이의 노래 구절이 들려올 때마다 장항준은 옆에서 잠자코 기다린다. 그리고 조용히 말한다. “다 불렀어요?” 좀 부르지 말라 그 얘기다. 또 다른 팟캐스트 '송은이 김숙의 비밀보장'에서 송은이와 화음을 맞춰주는 절친 김숙과는 또 다른 절친의 리액션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개의치 않아하는 송은이며, 언젠가 또 그런 송은이의 흥을 따라 같이 합창하기도 하는 장항준의 케미를 두고 청취자 중 한 명은 “권태기를 지나고 다시 불이 붙은 부부 같기도 하다”며 평을 남겼더랬다. 두 패널은 부정했지만. 오랜 관계에서 비롯한 그 주거니 받거니가 한없이 편한 청취자라면 알 것도 같은 이야기다.
'씨네 마운틴'의 풀버전은 팟캐스트 사이트에서, 하이라이트 장면에 대한 클립 영상은 유튜브 영상에서 볼 수 있다. 보통 인기를 끄는 건 10분 내외의 비교적 보기 편한 10분 내외의 영상 클립인 것 같지만 개인적으로 '씨네마운틴' 방송의 정수는 1시간 버전의 팟캐스트 풀버전이라고 생각한다.
재밌는 '썰' 중심으로 편집된 유튜브의 영상들도 물론 탁월하다. 그치만 산을 기어오르는 입등반을 목표로 하는 영화 리뷰 프로그램이라면, 영화 제목을 얘기하다가도 생각나는 그 때 그 시절 CM송을 부르든가 외국인 영화감독을 설명하다가도 패널과 친분이 있는 한국인 감독의 또 다른 고군분투기를 듣든가 하는 과정을 온전한 풀버전으로 꼭 한 번 겪어보길 바란다.
듣다가도 너무 길어 목이 타고 중간중간 화장실도 가고 싶은 마음이 드는 팟캐스트의 1시간 동안 꼭 등산을 타는 기분이 든다. 결코 정상까지 다다르지 못한 날이 있다고 해도 그 긴 호흡을 가져가는 동안만큼은 팟캐스트를 듣는 나와 그토록 영화를 좋아하는 두 패널, 그리고 영화만이 한 자리에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게 묘미라면 묘미다.
정신 빼놓고 있다간 근데 지금 이 얘길 왜 하는 거지? 라는 반문이 돌아오다가도 와하하 웃음 한바탕으로 끝나버리는 이 길 잃음은 아득하지 않고 외려 재밌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든데 입등산을 거치고 난 1시간 후에 돌아보면 그간 우리가 몰랐던 발자취 가득이다.
결국 영화는 사람 사는 얘기를 다루는 것이니 우리가 하는 사람 사는 얘기도 그 영화와 별반 다를 바가 없다던 말이 뒷통수를 저릿하게 한다. 아 당했구나. 또 송은이가 기획한 프로그램에 이렇게 말려버렸구나, 나는 이 수다를 꼼짝없이 좋아할 수밖에 없겠구나. 애정을 쏟는 건 역시나 그 다음에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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