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타지? 너무 좋다. 현실감 없는 다른 세계 완전 환영이다. 원래부터 판타지를 이렇게 좋아하진 않았다. 이내는 현실과 비슷하고 리얼리즘이 있는 걸 선호하는 편이었다. 추리나 다큐스타일을 좋아했던 전에는 그랬다. 지금도 추리를 너무너무 사랑하지만 요즘은 그보다 ‘다른 세계’에 관심이 커졌다. 현실의 고민을 잊기엔 다른 세상만큼 좋은 게 없어서일까, 나는 그런 부류의 영화들만 보고 있었다. 그래서 이번 크리스마스엔 ‘해리포터’ 시리즈를 처음으로 봐야겠다 결심했는데 얼결에 ‘반지의 제왕’을 틀고 말았다. 개봉한 2001년부터 지금까지 20년간 오크와 골룸의 징그러움이 싫어서 애써 외면하고 있었는데 봉인이 깨진 셈이었다.
반지의 제왕 영화는 총 3부작으로, J.R.R. 톨킨의 소설이 원작이다. 소설도 3권으로 이루어져 있고 영화도 책의 부제에 따라 1 – 반지원정대, 2 – 두 개의 탑, 3 – 왕의 귀환이란 부제를 달고 있다. 1950년대에 집필한 소설로 판타지 세계관의 축을 닦았다 평가된다. 현재 우리가 생각하는 엘프나 오크의 전형적인 모습은 톨킨이 만들어낸 것이며 톨킨은 언어학자로 엘프의 언어도 직접 창조해 써넣었다.
이런 톨킨의 원작을 영화화한 감독 피터 잭슨의 반지의 제왕 시리즈 줄거리를 짧게 정리하자면, 1부 반지원정대는 절대 반지를 얻게 된 호빗 프로도가 절대 반지의 원주인이자 중간계 정복을 원하는 사우론의 손에 반지가 들어가지지 않고 유일하게 파괴시킬 수 있는 모르도르의 산으로 향하는 여정에 아라곤, 레골라스, 간달프 등과 원정대를 이룬다는 내용이다. 2부인 두개의 탑은 프로도와 샘이 모르도르로 향하고 다른 원정대들은 사우론과의 인간들의 전쟁에서 큰 축인 로한 제국을 위한 전쟁을 치르는 내용, 나머지 3부인 왕의 귀환은 절대 반지의 마지막 여정과 곤도르의 왕족 후손인 아라곤이 사우론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이루고 진짜 왕으로 귀환하는 내용이다. 3부작은 결국 사우론과의 싸움에서 절대 반지를 파괴하여 중간계의 평화를 지키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반지의 제왕 첫 시리즈 반지 원정대의 개봉이 2001년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2021년. 나는 진짜 20년 만에 반지의 제왕을 봤는데도 반지의 제왕이 촌스럽다거나 역시 기술력이 별로구나 하는 생각이 안 들었다. 오히려 보고 난 후에 개봉 시기를 보고 놀랄 뿐이었다. 특히 '골룸'의 존재나 캐릭터들의 크기 대비 등 얼마나 촬영에 정성을 들였을지 가늠되는 부분들이 넘쳤다. 물론 지금 기술이면 더 잘 구현했을 모습들이나 CG 장면들이 있겠지만 그것보다 지금은 저런 장소들이 있을까? 싶어지는 설산이나 평원, 호빗 마을 같은 녹색지대들이 판타지의 느낌을 더 잘 살려주었다. 그래서 영화를 보며 가장 많이 들었던 생각은 20년 전의 나와 지금의 내 생각 차이였다. 그때는 이랬을 텐데, 지금 보니 이렇네 하는 깨달음들이 영화 내내 자리했다.
나는 반지의 제왕을 보기 전까진 레골라스와 골룸. 딱 둘만 알았다. 레골라스는 잘생겨서 하도 많이 보였고 골룸은 모르려야 모를 수 없을 정도 방송에 활용됐다. 난 그래서 사실 골룸 vs 반지원정대인가 하는 생각도 해봤다. 아무튼 그렇게 둘밖에 몰랐는데 이번에 영화를 제대로 보고 '아라곤'에게 빠졌다. 아라곤은 반지원정대의 리더이며, 인간계 곤도르 왕국의 적통자이다. 불리한 사우론과의 전쟁에서 반지의 제왕 시리즈 내내 사람들을 이끄는 역할을 한다. 하지만 그것보다 내 눈길을 끈 건 일단 잘생겼고, 믿음직스럽고 다정하며, 눈이 자동 멜로눈깔이라는 점이었다.
반지의 제왕에선 미남 취향이 크게 아라곤파와 레골라스파로 갈린다. 또렷하고 무게 있는 인간계 미남의 아라곤과 하얗고 화려하게 생긴 엘프족 미남 레골라스 사이에서 취향이 나뉘는 거다. 나는 정말 철저하게 '레골라스파'였다. 일단 아라곤을 몰랐고 예전이면 알았어도 레골라스였을 정도의 취향이었다. 그런데 막상 영화를 보니 아라곤의 멜로눈빛에 속절없이 당해 헤어나올 수가 없었다. 20년이란 시간 차가 내게 미냠 취향마저 바꿔놓을 만큼의 힘을 작용했다. 진짜 내가 에오윈이었으면 먼저 그렇게 눈빛으로 꼬셔놓고 갑자기 선 그었다고 아라곤 고소했을 거다.
취향이 바뀐 것처럼 세월이 바꿔버린 게 또 있다. 20년이 지난 영화인 게 문제가 안 되다가, 여기서 발목이 잡혔다. 아라곤을 좋아하건 레골라스를 좋아하건 아무 문제가 없지만 진짜 문제는 이들의 미모가 20년 전의 미모라는 점이다. 현재 아라곤 역을 맡았던 배우인 비고 모텐슨을 보면 물론 지금도 멋지지만 더이상 그 때의 아라곤을 느낄 수 없다. 물론 레골라스도 그렇다. 20년 전 작품을 지금 봤더니 내가 방금 본 미남들은 어디에 있는지, 정말로 모니터 속에서만 존재하는 인물을 좋아하게 되어버렸단 사실에 가슴이 아팠다.
프로도 vs 샘에서도 역시 나의 세월을 느꼈다. 프로도는 반지를 직접 지니고 배달하는 임무를 맡은 호빗이다. 그런 프로도를 처음부터 끝까지 여정을 같이 하는 정원사 호빗 샘. 그 둘의 여정을 보는데 아무래도 무턱대고 주인공을 좋아하던 어린 날과 지금은 다르단 느낌이 들었다. 그때라면 나는 분명 프로도를 좋아했을 것이다. 일단 잘생겼고, 보호본능을 일으켜서 자꾸만 응원하게 되고 주인공이기 때문에 격하게 프로도로 쏠렸을 것이다.
그런데 20년이 지난 나는 ‘샘’의 말들에 영향을 받고 샘의 행동에 고개를 끄덕인다. 생각보다 샘의 말들과 경계심들이 성숙하고 진실했다. 내가 두려움이 많아지고 고집세진 걸지도 모르지만 샘이 맘에 들었다. 지금의 나는 프로도를 지켜주고 싶어하기보다 샘의 불안감에 공감하고 그가 하는 말에 위로받는 쪽이니까. 프로도가 약하면서 강인한 자라면 샘은 굳건하고 흔들림 없는 자다. 골룸을 항상 경계하고 맨 처음 간달프에게 들었던 프로도 곁을 떠나지 말라는 말을 충실히 이행한다.
하지만 샘의 말대로 골룸을 일찌감치 제거했다면 절대 반지의 파괴도 없었을 거다. 아마 중도에 길을 잃어 애초에 모르도르에 도달할 수 없을 수도 있고, 마지막 순간 사우론에게 반지가 전달됐을 가능성도 크다. 프로도의 결정도 옳은 결정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샘이 끝까지 평화로웠던 평소를 상기시키고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다라고 희망을 꺾지 않는 모습을 볼 때마다 가득 찼던 절망이 환기됨을 잊을 수 없다.
마지막으로 세 편의 시리즈 중 어느 편이 좋았는가이다. 내가 막 반지원정대를 시작할 쯤 내 꼴을 보던 엄마 아들이 이걸 이제 보냐면서 여러 얘기를 해주었다. 그중에서 왕의 귀환이 아무래도 명장면이 많고 제일 재밌을 거라고 얘기해주었는데 다 보고 난 후 그 이야기를 곱씹어봤다. 나는 세 편 중에서 어느 편이 제일 좋았지? 했을 때 아무래도 나는 2편 두 개의 탑이 젤 먼저 생각났다.
웅장한 전투씬과 마지막 최후, 당연히 왕의 귀환은 기억에 남았다. 하지만 나는 결말보다 과정을 더 좋아하는 사람이다. 과정에서 소소하게 드러나는 비밀이나 관계성, 캐릭터의 비하인드 같은 작은 디테일을 곱씹는 걸 좋아하다 보니 두 개의 탑이 더 좋았다.
특히 호빗 피핀과 메리의 활약이 가장 두드러지는 편이라 맘에 들었다. 피핀과 메리는 호빗답게 심각한 상황을 느끼지 못하고 위험한 상황들을 많이 만들곤 했는데 두개의 탑에선 여러 가지 면이 잘 보인 것 같아서 귀여웠다. 세 편중 어느 게 아쉬웠다거나 부족했다거나 느끼지 않았다. 그냥 이야기상에서 엔트들을 찾아가는 메리와 피핀, 세오덴왕을 구하는 아라곤과 일행들, 어려운 전쟁에서 세오덴을 다독이고 이겨내는 아라곤 등이 더 좋았을 뿐이다.
20년이란 시간이 흐른 후에도 영화에 빠질 수 있게 하는 이야기의 힘. 반지의 제왕 시리즈에서 뼈저리게 느끼고 흘러버린 미모에 눈물지었다. 나는 오늘 예전에 발매되었던 반지의 제왕 영화 시리즈 DVD 중고를 샀다. 20년 전이라 비하인드나 정보를 더 찾기가 어렵기도 했고 아무리 봐도 내가 두고두고 돌려볼 것 같아서 미리 대비하기로 했다. 그리고 피터 잭슨이 제작 시 여러 방면의 비하인드를 아주 세세하게 담았다는 DVD가 보고 싶기도 했다.
며칠 비하인드를 미친 듯이 찾다가 최근에 화상으로 반지의 제왕 출연진들이 모인 영상을 잠깐 봤는데 20년 세월을 한방에 체험한 기분이 들었다. 저 때의 캐릭터가 나이 든 후년의 모습을 본 것 같기도 해서 즐겁기까지 했다. 20년 동안 어떻게 반지의 제왕을 안 본 건지 20년 봉인 잘 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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