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가 되었다. 세상의 모든 새해를 다 끌어모아도, 2021년 1월 1일만큼이나 환영 받은 전적이 있었는지? 모두를 당혹케했던 2020년이 끝나는 날, 우리가 서로에게 건넸던 "새해 복 많이 받으라"는 말은 사실 황당무개한 작년이 어서 끝장나길 바라는 의미를 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2020년을 그야말로 온전하게 보낸 이가 전세계적으로 몇이나 되겠는가.
이 글을 쓰고 있는 나 또한 마찬가지이다. 흰지에게 2020년이란 '처참하게 쓰러진 모든 계획'이자 '만나지 못한 지인들과의 약속'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손바닥 뒤집히듯 ‘모든 것이 바뀌어버린 나의 취미생활’이었다. 전염병을 피해 집으로, 랜선으로 숨어들었던 내가 가지 못했던 ‘오프라인 현장’ 말이다. (마스크를 쓰지 않는) 사람들이 바글거리고 (질병에 대한 걱정 없이) 자신의 취미생활을 하러 모여든 어떤 공간. 나에겐 그것이 영화였다. 영화관으로 영화를 보러 가는 일이었다.
나는 독립영화에 각별한 애정을 가지고 있다. 한국 멀티플렉스 환경의 특성 상 독립영화를 보기 위해서는 주로 전용 상영관을 따로 방문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2020년 이전까지만 해도 독립영화 상영관과 매년 그 영화들을 발굴하는 독립영화제들을 제 집 다니듯 드나들었다. 영화를 보는 일 외에도, 배우들과 감독이 관객과 조우할 수 있었던 GV현장, 무대인사부터 시작하여 ‘이 영화가 그렇게 좋다던데’라는 소문만을 듣고 그 작은 영화들을 보러 보인 관객들의 들뜬 온기들까지. 이제는 그것들을 모두 ‘참 전생 같다’라 불러야 하는 현실이지만 말이다.
영화관이 열려있음에도 불구하고 관객으로서의 나는 매번 확진자 수를 헤아리며 그 곳에 갈 수 있는 기회를 좀처럼 잡지 못했다. 주최측에서도 마찬가지였다. 2020년 동안 많은 영화제들이 온라인 개최 혹은 축소 운영을 선택하였고, 독립영화관의 경우 그간의 인기작들을 재개봉 하는 등 다가온 변화에 몸을 맞췄다. 그 김에 우리는 모두 웅크린 채 한 해를 보냈어야만 했다.
그리고 지금은? 내 취미의 2021년은 새 시작보다는 작별이 앞섰다. 바로 2021년 1월 13일에 들려온 한 영화제의 종료 소식 때문이었다.
어떤 이에겐 샴푸 이름으로 더 친숙하지 않을까 싶은데. 미장센 단편영화제는 매년 장르적인 색채에 포커스를 두고 국내의 수많은 개성파 감독들의 등용문이 되어주었던 축제였다. 짧게는 10분 내외의 시간 동안 어떤 스펙타클을 관객들에게 보여줄 것이느냐의 질문은 적어도 이 영화제 안에서 치열했다. 그만큼 영화팬이라면 안타까워할만한 소식이었다. 내가 가장 먼저 접한 독립영화제도 바로 이 미장센이었는데, 내 첫 시작이었던 영화제가 올해부터 더 이상 열리지 않을 계획이라니.
사실 이 시국으로 인한 무언가의 잠정중단 소식은 이번만이 아니다. 역시 매년 봄 양질의 다큐멘터리 영화들을 선보이던 인디다큐페스티발 또한 작년 12월 31일에 영화제 및 사무국 운영의 잠정중단을 알려왔다. 영화제 및 GV행사가 자주 열리곤 하였던 CGV 명동역 씨네라이브러리는 사실 작년 10월 폐관하였으며 서울 홍대입구역에 위치한 KT&G 상상마당 역시 영화사업부 권고사직의 문제로 논란을 빚었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이 시국에 그 누구도 피할 수 없었던 바람이, 여기 내가 사랑한 이 판에서도 불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매섭게.
좋아하는 것에 대해 쓰기 위해 고개를 들었더니 좋아하는 것들이 다 ‘날아가고 있는’ 광경을 목격하는 기분이란. 생경하기도 하다. 내가 사랑하는 영화 속 인물들은 암만 밖에 나와있어도 마스크 한 장을 끼고 있질 않던데 그 영화를 둘러싼 마스크 한 장으로 울며 겨자 먹으며 모든 것이 변화하고 있었으니.
그렇다고 작은 관객이자 일개 팬인 내가 사업의 직격탄을 막을 슈퍼 히어로가 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이 생각에 다다르니 좀 묘해졌다. 반대로 영화제에서, 영화관에서 좋은 독립영화를 본 경험들은 지치고 힘들어 쓰러져있던 나를 자주 일으켜주곤 했기 때문이다.
내가 처음으로 미장센 영화제를 보러간 2017년이 그랬다. 그간에 내가 접해왔던 ‘영화제’란 TV 속 영화를 좋아하는 가족과 매년 챙겨보던 ‘청룡영화제’뿐이었다. 그래서 그 곳에 대한 인식도 ‘참 화려하기 짝이 없는 드레스’. 딱 거기까지였다. 당시 학교생활로 지쳐있던 내가 우연히 SNS에서 영화제 포스터를 발견하고 그것도 혼자서 가보기로 결심한 이유도 바로 그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좀 시끄럽더라도 특별한 곳에 있어보고 싶단 생각.
과연 예상대로였다. 내가 예매한 단편영화섹션이 시작하기 5분 전까지 객석은 들뜬 대화소리로 가득 차있었다. 영화제에서 공개되는 영화, 누군가의 영화가 개봉했다는 사실이 이렇게 큰 소음으로 와닿을 수 있다는 것을 그때 깨달은 듯했다. 나는 그 열기가 제법 좋았다.
정말 맛을 들이게 된 순간은, 그 열기 이후에 영화가 시작하고 나서였다. 특히나 내가 골랐던 단편영화섹션은 같은 주제로 묶인 4-5편의 단편들이 연속으로 상영되는 형태였다. 10분 내외의 작품이 시작했다 끝나고 그 감동을 다 삼키기도 전에 뒤따라오는 다음 작품들의 행렬. 큼직한 자본의 맛이 미처 다 끌어안지 못하는 작은 이야기, 그러나 결코 작지 않은 그 안의 인물들이 살아 숨 쉬는 현장 같았다. 재밌었다. 보고 또 보고 싶었을 만큼.
이후로 나는 영화를 보고, 보고서 좋으면 또 보고, 그래도 성이 차지 않으면 GV 해설을 찾으러 다니며 발품을 뛰었다. 그리고 그 오프의 현장들은 오프를 뛰지 못하는 지금으로선 모두 추억으로 미화되어버렸다. 그렇지만 분명 지금도 내 일상의 어느 한 구석을 든든하게 뒷받침해주고 있는 기억이기도 하다. 그때 내 안에 쌓인 영화들은 취향이 되었고, 나는 그렇게 내 취미에 빚을 지고야 말았다. 그래서 마냥, 지금은 사라진 그 현장의 열기를 그리워만 하며 울고 있을 수 없다는 것도 안다. 새해벽두부터 정든 장소를 떠나보낸다고 해도 마냥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다는 이야기다. 이것이 이 이야기를 시작하게 된 이유이다.
번갯불에 콩 구워먹듯 새해인사를 건넸지만 모두가 안다. 상황이 급격하게 좋아질 보장도 가능성도 없다는 것을. 이럴 때일수록 새로운 움직임에 더욱 더 곤두서야 하지 않나 싶다. 주목하고자 하는 키워드는 바로 '비대면'이다. 내가 독립영화를 접하고 싶을 때마다 의외로 유용하게 활용하고 있는 곳을 소개하고자 한다. 바로 OTT 서비스에서 제공하는 독립영화 카테고리이다.
왓챠에선 KAFA 상영작 외에 기타 많은 중단편 영화들을 볼 수 있다. 아예 독립영화와 여성영화에 방점을 두고 스트리밍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는 퍼플레이의 행보도 주목해볼만 하다. 아직 독립영화의 OTT 시장 배급이 활성화되었다고 진단을 내리긴 무리지만, 변화하는 시대에 발 맞추어 비대면으로도 어떻게든 이 산업을 유지하고자 하는 움직임은 곳곳에서 보인다. 이외에도 유튜브 등에서 독립영화 감독들이 자신의 작품을 공개하는 경우도 점점 늘어나고 있다. 2021년도의 살아남은 영화제들 또한 온라인 및 모바일 환경의 스트리밍 서비스와 함께 시국을 헤쳐나갈 것으로 예상된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각개전투로 예술 활동을 이어나가고 있는 이들은 분명 존재한다. 관객이 볼 영화가 남아있는 한 최악은 아니라 믿고 싶다. 상황이 앞으로 어찌될지 모르고 좋아하는 것들이 불안해져온다면 적어도 우리는 우리가 애정을 쏟는 것으로부터 눈길을 떼지 말아야 할 것이다. 새로운 해가 뜬지 15일이나 지났고 우리는 저마다의 좋아하는 것들을 끌어안고 다시 앞으로 나아가야 하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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