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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만 원짜리 핸드워시로 나를 보살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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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즈앤엔즈(odd_and_ends) 2020. 3. 11. 2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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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 전이었나, 영화 「리틀 포레스트」를 보고 울었다.

 


솔직히 그 영화에서 울 포인트가 어디 있냐고 물으면 대답하기가 다소 멋쩍지만, 하여튼 뭉클했다. 여주가 자신을 묵묵하게 보살피는 방식이 너무나 정직하고 순수해서, 텃밭을 가꾸고 건강한 음식을 해먹는 행위가 결국엔 자신을 가꾸고 키우는 최선의 방법이라는 걸 알아서, 이쁜 옷을 사고 화려한 화장품을 사는 것보다 더 용기 있고 아름다워 보여서라고 말하면 누군가는 나를 이해해줄까.(아마 아무도 없을...ㄱ...)

 

 

 

 

▲ 잔잔한 위로가 되었던 영화, 리틀 포레스트 (출처 = 네이버 영화)

 

 

깊은 감동을 받았던 나는 ‘나도 나를 보살피겠어!’라며 한동안 식재료 배달 어플을 통해 열심히 신선한 재료들을 시켰다. 그 푸릇푸릇하고 싱그러운 채소들은 나의 극진한 환대를 받으며 집으로 입성했고, 한 달 뒤 상하거나 말라비틀어진 모습으로 냉장고에서 발견되었다.

 


더 일찍 깨달았어야 했다.

 


나는 요리와 맞지 않다는 사실. 우리는 만나선 안되는 인연이었던 거다.

 

 

▲ 차차는 이곳에 앉아 보내는 저녁시간을 사랑한다 (사진=차차)

 

 

그리고 일 년쯤 지나 혼자 사는 시간이 쌓이면서 요리를 대신해서 내가 나를 보살 필 수 있는 방법을 알아가기 시작했다.

 


은은하게 켜둔 노란 조명, 잔잔한 음악, 향긋한 바디워시, 따뜻한 물이 몸에 닿는 촉감, 2만 원짜리 체크무늬 잠옷. 허기질 때 우유에 말아먹는 시리얼. 뭐 이런-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쉽게 가질 수 있는 것들이다.

 

 

▲ 동거묘와 함께 보내는 저녁 (사진=차차)
▲ 망고와 나나 (사진=차차)

 

그 후, 나는 퇴근 후 나의 삶을 좋아하는 것들로 채우기 시작했다. 퇴근 후 집에 들어와 따뜻한 물과 향기로운 바디워시로 몸을 씻은 후에 체크무늬 잠옷으로 갈아입는다. 형광등은 켜지 않은 채 작고 노란 스탠드 3개와 조용하게 음악을 켜둔다. 세팅을 마치고 손에 시리얼을 들고 밀린 드라마를 보거나, 나의 두 동거묘들과 장난을 치며 함께 시간을 보낸다.

 


거창할 것이 없는 것들이지만, 이 시간이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다.

 

 


나의 행복의 기준에 따라서 나의 소비도 조금은 달라졌다. 요즘은 보이는 것보다도 나의 저녁시간을 풍요롭게 채워주는 것들에 조금 더 과감히 지갑을 열곤 하는데,  4만 원짜리 이솝 핸드워시가 바로 그중 하나다. 니트 하나를 살 때도 3만 원이 넘으면 살까 말까를 백 번은 고민하지만, 이솝 핸드워시는 향과 거품을 보고 한치의 망설임 없이 질러버렸다.

 

 

▲ 하루의 끝을 책임지는 이솝 핸드워시(사진=차차)

 

 

내 인생이 늘 여름이길 고집했던 그때, 늘 축제이길 바랐던 20대 초반에는 몰랐던 가치다. 따뜻한 물로 손을 씻을 때의 기쁨.

 


이것이 아니어도 날 즐겁고 행복하게 하는 일들이 많았고, 늘 그런 상황들을 열심히 쫓았기 때문에.

 


하지만 20대 후반, 그러니까 30대를 앞두고 조금씩 배우기 시작했다. 삶은 늘 축제가 아니며, 때로는 가을과 겨울도 온다는 사실을. 그 시간들을 지날 때는 특별한 어떤 일보다도 퇴근 후 나를 반겨주는 고양이들, 따뜻한 목욕, 향기로운 거품들이 꽤나 위로가 되는 포인트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지금의 내게는 니트 하나가 주는 행복보다도, 기분 좋은 향과 거품을 가진 핸드워시 하나가 주는 삶의 행복이 더 크다는 사실을.

 

 

 


어쩌면, 나의 자존감을 높여주고 나의 행복감을 지켜주는 것들은 남자친구한테 얼마나 사랑을 받는지, 혹은 나의 연봉이 얼마나 올랐는지, 회사에서 인정을 받는지에 대한 것이 아니라, 

 


정작 내가 나를 어떤 방식으로 보살피고 있는지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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