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을 처음 배우기 시작한 날, 엄마는 내 손을 붙들고 집 앞 문방구에 데려갔다. 그 시절 엄마는 다소 엄격한 편이었다. 특히 뭔가를 구매할 때는 좀처럼 내게 선택권을 주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은 웬일인지 엄마가 내 손에 연필 한 다스를 쥐여주며, 일기장을 고르라고 했다. 일기장이 뭔지 몰라 물었더니, 엄마는 '하루 동안 있었던 일들을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 적어두는 곳'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매일 밤 엄마가 뭔가를 적는 그 공책도 일기장이야'라고 덧붙였다.
고심 끝에 노란색 배경에 '미피'라는 토끼 캐릭터가 그려진 얇은 일기장 한 권을 골랐다. 그리고 그날 저녁, 인생 처음으로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처음 일기를 쓰던 밤, 그 설레던 마음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쓰고 싶은 건 잔뜩인데, 노트 한 면은 왜 이리도 작은지. 글자마다 손에 힘을 잔뜩 쥐어가며 써 내려갔던 기억이 생생하다. 당시 유치원에서 배운 '가나다라마바사'가 아는 전부였기에 줄기차게 한글만 반복해서 적었다. 우습지만 내 나름 '가나다라마바사'에 많은 이야기를 담았다. 예컨대 '나 오늘 글자를 배웠다'와 같은 자랑과 더불어 '처음 일기를 쓴다'는 들뜬 마음 같은 것을. 되돌아보니 그때 처음으로 기록이 주는 희열을 느꼈던 것 같다.
매년 해가 바뀌면 엄마는 나를 문방구에 데려가 일기장을 고르게 했다. 하나하나 노트를 살피고, 고르는 그 순간만큼은 누구보다도 진지하고 행복했다. 이때부터 새해가 밝으면 가장 먼저 노트를 산다. 27살이 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거른 적이 없다. 매해 노트를 사는 건 내게는 일종의 연례행사와도 같은 행위인 셈이다. 4살 때와 달라진 게 있다면 지금은 일기가 아닌 아이디어 노트를 산다는 것 정도.
몰스킨을사는이유
어느 순간부터 노트를 고르는 시간이 짧아졌다. 다른 걸 둘러볼 필요 없이 몰스킨을 집어 들기 때문이다. 몰스킨은 이탈리아의 다이어리 브랜드다. 다소 생소할 수도 있는 이름이다. 이해를 돕자면, 매년 대란을 일으키는 스타벅스 다이어리를 몰스킨이 만든다.
올해도 나는 어김없이 몰스킨을 샀다. 이번이 벌써 4번째다. 보통 몰스킨을 사용한다고 하면 두 가지 반응이 나타난다. 하나는 '그게 뭔데?'라는 대답, 또 하나는 ‘허세템’이라는 부정적 반응이다. 후자는 아무래도 몰스킨의 사악한 가격이 한 몫 톡톡히 했을 것이다. 확실히 몰스킨은 비싸다. 현재 내가 사용하고 있는 베이지색 소프트커버, 라지사이즈 제품은 20,900원이다. 비슷한 크기와 두께의 다른 노트는 몰스킨의 10분의 1 가격인 2,000원에도 구매할 수 있다.
몰스킨 다이어리의 가격 대비 품질, 즉 가성비가 특별히 뛰어난지를 묻는다면 당연히 아니다. 디자인부터 살펴보면 몰스킨은 아무것도 없는 무늬 없이 깔끔한 표지에 고무줄 홀더, 노트 맨 뒷장에 있는 수납공간이 디자인 전부다. (별거 없다고 표현했지만, 이 디자인이야말로 몰스킨의 여러 인기 이유 중 하나다. 단순하지만 명확하고 깔끔하다.) 퀄리티도 별반 다르지 않다. 중성지 내지는 잉크가 뒷장에 비쳐 품질 논란까지 겪고 있다. (일부 사람들은 모스킨 제조국이 이탈리아에서 중국으로 바꾸면서 품질이 저하됐다고 한다. 사실, SG캐피털에서 몰스킨 회사를 인수하면서 '중국에서 인쇄되고 제본됨'이라는 문구를 추가한 것일 뿐. 본래부터 모도앤모도의 몰스킨 노트는 중국에서 생산했다.) 그럼에도 매년 비싼 값을 내며, 몰스킨을 사는 이유는 몰스킨만이 가진 브랜드 매력 때문이다.
반 고흐와 피카소가 사용했던 노트
몰스킨의 브랜드 매력을 알기 위해서는 그 역사부터 들여다봐야 한다. 꽤 흥미로우니 말이다. 본래 몰스킨은 촉감이 부드럽고 따뜻한 느낌이 나는 면직물을 의미한다. 부드러운 감촉 덕분에 수첩이나 노트 커버, 서류 케이스 등에 많이 사용된다. 현재는 본래의 의미보다 매년 1,000만 개 이상 팔리는 노트 브랜드로 더 유명하다.
몰스킨 노트는 200여 년 전 프랑스에서 만들어졌다. 당시 몰스킨 노트는 두툼한 속지와 검은색 몰스킨 소재 커버, 그리고 이를 묶어주는 고무 밴드가 특징이었다. 특히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 앙리 마티스(Henri Matisse),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 어니스트 헤밍웨이(Ernest Hemingway)등이 몰스킨 노트를 애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처럼 한 시대를 풍미했단 예술가, 지식인들이 몰스킨을 사용했던 걸 보면, 당시에도 몰스킨 노트는 유럽 내 제법 인기가 있었던 모양이다.
실제로 몰스킨이 유명해진 것 역시 '파타고니아(In patagonia)'와 '송라인(Songlines)'의 저자 브루스 채트윈(Bruce Chatwin)의 역할이 크다. 브루스 채트윈은 그의 작품인 '송라인'에서 몰스킨 노트에 대해 구체적으로 묘사했다. '모서리가 둥근 직사각형의 단순한 검은색 노트. 고무줄 페이지홀더와 확장 가능한 안쪽 포켓이 있다'고.
브루스 채트윈과 몰스킨에는 유명한 이야기가 몇 가지 있다. 그는 1986년 오스트레일리아로 여행을 떠나기 직전, 단골 문구점에 노트를 사러 갔다. 당시 브루스 채트윈은 몰스킨 노트 공급이 줄어들 거라는 소식을 접하고, 사재기에 나섰다. 당시 브루스 채트윈은 몰스킨 노트를 무려 100권이나 한 번에 주문한 것으로 알려졌다. (아무리 몰스킨이 좋다 해도 100권이라니!) 하지만 브루스 채트윈은 몰스킨 노트를 받지 못한다. 몰스킨 노트 제조업자가 갑작스럽게 죽어 몰스킨 노트를 살 수 없게 됐기 때문이다.
또, 브루스 채트윈은 해외여행을 가기 전 반드시 몰스킨을 챙겼다고 한다. 그는 여행에 관한 모든 것을 몰스킨에 기록했다. 이 때문에 브루스 채트윈은 늘 '여권을 잃어버려도 상관없다. 하지만 노트를 잃어버리면 큰일이다'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심지어 그는 본인의 몰스킨 노트에 노트를 잃어버렸을 경우를 대비해 찾을 수 있도록 자신의 이름과 함께 '이 노트를 찾으신 분에게는 사례하겠습니다'라고 적어놨다. 재밌게도 이 문장은 현재까지 이어져 지금 판매 중인 몰스킨 노트의 맨 앞장에는 사례금을 표시하는 공간이 있다. 두 가지 일화 모두 브루스 채트윈의 몰스킨 사랑이 여실히 드러난다.
안타깝게도 브루스 채트윈이 사랑했던 프랑스제 몰스킨 노트는 현재 내가 쓰고 있는 이탈리아 브랜드의 몰스킨 노트가 아니다. 그 시절 예술가들이 사용했던 프랑스제 몰스킨 노트는 1986년까지 생산됐다. 지금 시판되고 있는 몰스킨은 이들이 사용한 노트를 비슷하게 재현한 것일 뿐이다.
현재 우리가 교보문고에서 구매할 수 있는 몰스킨 노트는 1997년 이탈리아의 출판사 '모도앤모도'가 몰스킨이라는 이름을 가져다가 재생산했다. 그 시절 프랑스제 '몰스킨'으로 불리던 노트처럼 둥근 모서리, 두툼한 무게와 두께, 부드러운 촉감의 커버, 고무줄 밴드, 확장 가능한 안쪽 수납공간까지 그대로 담았다. 다른 점이 있다면 프랑스제 몰스킨은 양피를 쓰는 반면, 이탈리아 몰스킨은 비닐 인조 가죽을 사용한다는 점이랄까.
따지고 보면 그럴듯하게 재현한, 진짜 아닌 가짜가 바로 현재의 몰스킨이다. 몰스킨은 본인을 반고흐, 헤밍웨이가 사용했던 프랑스제 몰스킨의 '상속자', '계승자'라고 전면에 내세운다. 신기한 건 몰스킨이 이 같은 예술가들을 내세워 브랜드 역사와 예술성을 입히는 것에 성공했다는 점이다.
'몰스킨'이라는 브랜드가 내게 주는 경험
"요즘 소비자는 사실 물건을 사는 것이 아닙니다. 물건 이상을 사죠. 바로 '경험(experience)'을 사는 것입니다. 물론 실체가 있는 물건을 사긴 하지만, 그것은 만질 수 있고 물리적인 니즈를 해소하기 위해서만은 아니에요. 만질 수 없고, 감정적이고, 지위나 정체성에 연관된 니즈를 해결하기 위한 것입니다. 매슬로우(Maslow)의 욕구 단계설처럼요. 우리 아이들의 세대에서는 더욱더 그런 방향으로 나갈 것입니다. 1995년에 다시 출시된 몰스킨 수첩은 기능적인 면에서는 검은 표지와 하얀 속지가 있는, 예전과 똑같은 물건이었어요. 하지만 시장에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도입됐습니다"
몰스킨의 '아리고 베르니(Berni)' 사장이 한 말이다. 그의 말에 따라 몰스킨을 산다는 것은 단순히 멋있는 수첩을 사는 것이 아니다. 몰스킨을 구매함으로 창의적인 사고, 창조력과 같은 경험을 사는 것이다. 단순히 몰스킨을 구매했을 뿐인데, 그 순간부터 몰스킨은 나를 창의적인 인간으로 혹은 창조적 공동체의 일부로 흡수시킨다. 즉, 브랜드를 소유하는 것 자체가 라이프스타일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누군가는 마케팅에 현혹됐다고 말할지 모른다. 몰스킨이 좋다고 말했더니 '브랜드 가치고 나발이고, 비싸서 좋아하는 거 아니야?'는 비난도 들었던 바 있다. 몰스킨을 사용함으로써 마치 창조적인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 내게는 이것이 중요하다. 조금 비싸더라도 굳이 몰스킨을 고르는 이유는 작은 사치와도 같은 셈. 굳이 이 제품을 쓰지 않고 가성비를 따질 수는 있다. 하지만 인생 모든 부분에서 가성비가 기준이 될 필요는 없으니까.
결국, 오늘도 난 몰스킨에 다음 글에 대한 구상을 한다.
[11월 기념일] 나에게 주는 연말 선물 (부제: Love yourself) (0) | 2020.02.19 |
---|---|
나와 당신의 '라미' (0) | 2020.02.04 |
편한게 좋아(부제: 데일리 가방 추천_아이띵소 가방) (0) | 2020.01.23 |
나 가을 타나봐(부제: 환절기 추천 아이템 5) (0) | 2020.01.23 |
향기는 추억을 싣고(부제: 향수 추천 '백지') (0) | 2020.01.23 |
요즘 인싸들의 필수템, 전동킥보드 (0) | 2020.01.22 |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