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무살, 첫사랑이 찾아왔다.
상대는 다른 과 동급생이었는데, 지독한 짝사랑이었다. 사랑에 대한 면역이 없던 탓일까. 사소한 것에도 아파했고, 행복했던 걸로 기억한다. 처음이기에, 서툴기에 더 날카로울 수밖에 없었다. 그 시절 나의 열락과 애수는.
시간이 약이라고. 하나 둘, 기억은 점점 흐릿해져 갔다. 하지만 한 가지, 시간이 지나도 선명하게 남는 것이 있었다. 바로 향기다.
첫사랑 그 아이에게서 늘 좋은 향이 났다. 시원하지만 부드럽고 섬세한 향기였다. 마치 파도 같았다. 넘실넘실 다가와 결국에는 철썩, 마음에 와 닿는 것이. 시간이 지나 첫사랑이 끝이 났는데도 한참동안 그 향기를 잊지 못했다. 그만큼 내 첫사랑의 여운은 상당히 길었다. 우연히 그 향을 맡기라도 하면 나도 모르게 멈칫하곤 했다. 나중에 알았지만 그 향수, 상당히 유명한 '블루 드 샤넬'이었다.
이때부터 향기에 대해 집착까지는 아니고, 집요한 구석이 생겼다. '나에게 어울리는 향수를 찾고싶다'는 일종의 집념과도 같았다. 내가 좋아했던, 또 동경했던 첫사랑처럼 말이다. 하지만 수 년을 이렇다 할만한 향기를 찾지 못했다. 향기보다는 향기에 어린 경험이나 추억을 바랐던 걸지도 모르겠다.
얼마전 향수를 샀다. ‘백지’라는 작은 향수 브랜드로, ‘제주 밤바다’라는 향이다. ‘제주 밤바다’는 산뜻하면서도 시원하게 퍼지는 바다와 같았다. 그래서 괜시리 그 시절 첫사랑이 떠올랐다.
첫사랑 때문에 구매한 것만은 아니다. 향기 그 자체보다 향수가 담고 있는 이야기가 더 눈에 들었다.
백지는 단순히 향수를 만들지 않는다. ‘향수를 연재하다’라는 슬로건에 걸맞게 사람들로부터 사연을 받는다. 이후 사연을 선정하고, 전문 조향사와 디자이너가 그 사연을 향기로 풀어낸다. 이야기야 말로 백지가 향을 표현하는 방식이다.
아래는 ‘제주 밤바다’ 향수에 담긴 사연 중 일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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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밤바다
(생략)
친구들의 노래에 반주처럼 들려오는 파도소리.
포근한 어둠.
그 하늘에 수놓아진 별들.
그 별을 품어주던 달빛.
제주도 여름 바다, 그리고 바람 타고 흘러오는 바다내음.
모든 게 다 너무나 잘 어우러져 있었어요
그 모든 풍경을 그냥 지나 보냄이 아쉬울 정도로
바다 위에 떠있는 저 별들이,
파도의 음악소리가 꿈은 아닐까.
지금이 가장 행복한 순간인 건 아닐까.
청량한 제주 바다 내음, 파도 소리
저 앞에는 행복한 노래 소리와 웃음소리가 들리고.
나를 중심으로 하늘에는 별과 달이 하얗게 빛나고 있었어요.
‘이 순간이, 이 대로, 이곳에, 그대로 멈추어 있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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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_’백지’ 공식 홈페이지 <제주 밤바다_이야기>
이처럼 백지 향수에는 저마다의 기억과 추억, 찰나의 장면이 담겨있다. 학창시절의 기억이나, 한여름 친구와 떠난 여행, 겨울에 포근한 이불 속에서 귤을 까먹던 기억처럼 소소하지만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경험들 말이다.
때문에 백지 향수는 제품명 역시 ‘벚꽃의 꽃말은 중간고사’, ‘제주 밤바다’, ‘이불덮고 귤까먹기’, ‘늦봄의 위로’, ‘우산쓰고 학교가기’처럼 순간을 나타낸다.
사연을 알고, 향을 맡아서 일까. 사연자의 추억이, 또 내 경험이 맞물리면서 향을 더 풍성하게 만든다.
백지는 ‘향수’라는 존재에게 다음을 기대하게 만든다. 현재는 ‘계절’과 ‘학교’ 두 가지 주제로 향수를 연재하고 있다. 최근에는 ‘첫사랑’ 사연을 주제로 만든 신제품이 나왔다. 텀블럭에서 크라우드 펀딩 형태로 판매하고 있다. 얼리버드 주문이기 때문에 20% 할인한 가격으로 구매가 가능하다.(나 역시 참여했다.)
이번 첫사랑 향수는 평범한 고등학생의 이야기를 향으로 표현했다. 여름과 가을 사이의 선선한 바람과 수업시간에 짝사랑하던 친구를 바라보던 기억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얼마 전, 백지 서울숲 매장을 방문했다가 첫사랑 향수를 맡아 볼 기회가 있었다. 풋풋한 사과향이라기에 가볍고 산뜻할 줄 알았는데. 아니다. 선선한 가을이 느껴지는, 생각보다 무게 있는 향이다.
향수, 아니 고등학생의 첫사랑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직접 향을 맡아보기를 추천한다. 어쩌면 그의 사연이 담긴 향기가 당신의 어떤 추억을 끄집어낼 수도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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