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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당신의 '라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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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즈앤엔즈(odd_and_ends) 2020. 2. 4.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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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에는 힘이 있다고 믿는다.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어떠한 강력한 기운같은 것 말이다. 특히 사람이 손으로 꾹꾹 눌러쓴 글은 그 깊이가 다르다. 때문에 손 편지는 화면 속 메시지보다 더 감동적이고, 한 글자 한 글자 눌러 쓴 필기는 컴퓨터 활자보다 오래 기억에 남는 법이다.

 


어릴 적부터 손으로 무언가를 쓰고, 그리는 걸 좋아했다. 고교시절, 원고지에 시를 쓰는 문예부에 들었던 것도, 미대 입시를 준비하며 밤낮없이 그림을 그린 것도.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다 같은 이유다. 사각사각. 펜이 종이 위를 움직일 때마다 손가락 끝에서부터 전해지는 이 감각을 사랑한다. 글자를 써내려 갈 때마다 마치 글자 하나하나에 내 기운을 담는 것 같아 좋다. 좋은 기운도 나쁜 응어리도 모두 다 글자에 녹아 든다.

 

 

 


만년필을 쓰기 시작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다. 만년필은 종이를 날 것으로 만든다. 어떤 종이에 어떤 기분으로 만년필을 잡느냐에 따라 종이 위에서 느낌부터 다르다. 어느 날에는 메마른 듯 뻑뻑 하다가도, 또 어느 날에는 잉크를 왈칵 쏟아내기도 하고, 조금만 움직여도 부드럽게 종이를 적실 때도 있다. 그래서 더 신중하게 글을 쓰게 된다. ‘공들인 만큼 쓰는 이에게도 읽는 이에게도 더 깊숙이 자리잡겠지’라고 생각하면서.

 

 

 

나의 첫 만년필

 


나의 첫 만년필은 회사 선배의 것이었다. 어떠한 이유에서 펜을 빌리게 됐는데, 마침 검정색 만년필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만년필임을 인지하자마자 ‘멋있다’고 생각했다. 이제 갓 대학을 졸업한 내게, 만년필이라는 존재는 ‘진짜’ 어른의 물건처럼 여겨졌기에.

 


그 이후, 한동안 만년필을 살까, 말까 고민했다. 잘 다루지 못하는 데다가 ‘만년필은 굉장히 비싸겠지?’라고 지레짐작했기 때문. 결국 한참을 망설이다가 교보문고로 갔다. 그리고 다짜고짜 직원에게 물었다. 만년필을 찾고 있다고. 뚜껑에 큰 클립이 달려있는 검정색 만년필이라고.

 

 


직원이 안내해준 곳은 ‘라미’가 진열된 부스였다. 내가 찾고 있는 그 제품은 라미의 수많은 라인 중에서도 바로 ‘사파리’였다.

 


검정색만 있을 줄 알았는데. 빨강, 파랑, 노랑 그 색상도 상당히 다양했다. 이게 만년필이 맞나 싶을 정도로 선명한 원색에 당황하기도 했다.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만년필은 검정, 실버, 골드 색상으로 한정 지어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이 지긋한 아저씨가 서재에서 편지 쓸 때 사용하는 ‘고상한 존재’ 쯤으로 간주했으니까.

 


결국, 수 많은 색상 가운데 가장 눈에 띄었던 노란색을 골랐다. 그리고 5년이 지난 지금도 노란색 라미 사파리를 사용하고 있다.(물론, 중간에 한번 잃어버리고 다시 구매했다. 최근에는 라미 샤프도 사용한다.) 베이지색 몰스킨 노트와 샛노란 라미만 있으면 뭐든 생각해낼 자신이 생긴다. 이 두가지는 나의 충실한 아이디어 메이트다.


 

 

라미에 대하여

 


라미는 독일의 필기구 브랜드다. 파커의 브랜드 매니저로 근무했던 ‘요제프 라미’가 1930년 설립한 ‘오토스 만년필 생산공장’에서 시작했다. 이후 1948년 독자 브랜드 라미가 설립됐다.

 


라미는 독일의 실용주의적인 미술, 디자인 운동인 ‘바우하우스’ 스타일을 계승한다. 때문에 대부분 만년필 제조사가 전통적인 고급 만년필에 주력한다면, 라미는 현대적인 디자인과 실용성에 기반을 두고 있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라미의 상징’이라고도 할 수 있는 ‘라미 2000’이다.

 

 

 


아버지 요제프 라미로부터 회사를 물려받은 ‘만프레트 라미’는 독일의 가전업체 ‘브라운’을 사랑했다. 그는 늘 브라운 스타일의 펜을 만들고 싶어했는데. 이는 브라운이 현대적인 감각을 자랑하는 독일 바우하우스의 철학을 따르기 때문이었다. 이에 라미 역시 바우하우스 디자이너를 물색했고, 때마침 브라운에서 나와 개인 스튜디오를 차리려고 준비 중이던 ‘게르트 A. 윌러’를 만나게 된다.

 


게르트 윌러가 처음 디자인 한 제품이 바로 라미2000이다. 라미2000은 군더더기 없는 심플한 디자인으로, 가운데가 볼록해 쥐었을 때 손에 착 감기는 것이 특징이다. 라미2000은 선풍적인 인기를 모으며 급속도로 팔려 나갔고, 반세기가 지난 지금까지도 생산하고 있다. 

 

 

 

 

현재 라미는 유럽 전역은 물론 한국과 일본, 중국 등 아시아 국가에서도 널리 판매되고 있다. 실제로 라미는 세계에서 세번째로 큰 필기구 생산기업이다. 생산지인 독일에서는 초등학교 입학 필수품으로, ‘라미 아니면 펠리칸을 사야한다’라고 할 만큼 ‘국민 필기구’ 브랜드로 여겨진다.

 

 

 

내가 라미를 사랑하는 이유

 


많은 만년필 브랜드가 있지만, 그 중에서도 라미를 선호하는 이유가 있다. 라미는 위트 있지만, 실용적이고, 또 고집이 있기 때문이다. 고객의 편의를 우선으로 생각하면서도 자기 주장이 확실한 브랜드를 좋아한다.

 


라미는 그 어떤 무엇보다도 글을 쓰는 행위에 집중한다. 따라서 화려한 디자인보다 글을 잘 쓸 수 있는 디자인을 지향한다. 단적인 예로, 외부 디자이너와의 협업을 들 수 있다. 라미는 고정적인 디자이너를 두지 않는다. 이는 매너리즘에 빠지 않기 위함이다. 라미는 자신들의 아이덴티티, 신념을 최고로 구현해줄 외부 디자이너와 작업한다. 덕분에 수많은 히트작이 탄생할 수 있었다.

 

 

 

다양한 라인업보다도 더 매력적인 점은 세계적인 디자이너들의 결과물을 합리적인 가격에 구매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내가 사용하고 있는 라미 사파리의 경우, 교보문고에서 5만원 대로 구매할 수 있다. 온라인을 이용하면 더욱 저렴하다.) 이 역시 라미의 철학과 관련 있다. 라미의 가격이 낮은 것 역시 바우하우스 철학 때문.

 


만프레트 라미는 말한다. “사치품은 고가여야 하지만, 디자인 자체가 고가여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디자인 브랜드이지 프레스티지 브랜드가 아닙니다”라고.

 


이렇듯 라미는 모두가 사용할 수 있는 펜을 만든다.

 

 

 

옳은 것이 아름답다

 

 

최고의 브랜딩은 본인이 옳다고 믿는 신념을 꿋꿋하게 지켜나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여곡절 속에서 신념을 지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본인들의 신념을 바탕으로, 고집을 이어가는 브랜드를 마주할 때면 더 진정성 있게 다가온다.

 

 

 


라미가 그렇다. 메이드 인 저머니(Made in Germany). 라미는 독일인의 사고방식, 감성을 필기구에 녹이고 싶어한다. 때문에 라미는 글로벌 기업임에도 불구하고, 전 제품을 독일에서 생산한다. 비용을 낮추기 위해서는 인건비가 저렴한 제 3국에서 제조하는 게 이득이지만, 비용보다도 품질 보증을 더 우선시하기 때문이다.

 


라미는 의사소통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다면 더 좋은 방법을 모색하는데 한계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 덕분인지 ‘실용적이고, 아름다운 디자인’이라는 라미의 아이덴티티는 철저하게 지켜지고 있다. (사파리 닙의 부실함은 항상 논란거리이지만)

 

 

 

라미는 다양한 디자인과 색상이 특징이다. 처음 라미 제품을 접한다면 디자인에 초점을 둔 나머지, 브랜드의 매력을 알아채기 어렵다. 라미가 가진 ‘쓰기’에 대한 고찰과 진정성은 생각보다 깊다. 그래서 이 브랜드에 대해 알수록 더 나의 펜을 사랑하게 된다.

 


오늘도 라미를 사용한다. 글자를 쓰고, 그림을 그린다. 펜촉을 타고 흐르는 잉크에 좋은 기운도 담아본다.


‘오.즈.앤.엔.즈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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