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의 줄거리 및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고백한다. 요 근래 오즈앤엔즈에 글을 쓰지 못했다. 쓰기엔 자꾸만 현생의 다른 일이 몰려와 쓰지 못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지를 발휘하여 키보드 앞에 앉지 않았으니 쓰지 않았다. 그런 나를 다시 눈이 번쩍 뜨이게 해준 드라마가 있었으니, 바로 최근 방영을 시작한 <작은 아씨들>이다.
<작은 아씨들>, 2022
김고은, 남지현, 박지후 주연
<빈센조> 김희원 연출
<헤어질 결심> 정서경 극본
가난하지만 우애있게 자란 세 자매가
대한민국에서 제일 부유하고 유력한 가문에
각자의 방식으로 맞서는 이야기
눈에 띄는 건 제일 먼저 배우들이다. 뜻밖의 사건으로 인생이 흔들리게 되는 첫째 오인주(김고은 역), 자기를 꺾고 싶어하지 않는 둘째 오인경(남지현 역), 언니들의 사랑을 한몸에 받는 막내 오인혜(박지후 역). 이름만 들어도 쟁쟁한 배우들은 모두가 알고 있는 소설 원작 <작은 아씨들>의 자매로 분한다. 그런데, 그야말로 드라마 <작은 아씨들>은 따뜻하고 아름답기만 한 원작의 전철을 밟지 않는다. 한국 사회의 가장 아랫단에서부터 시작해 가난으로부터 자매들이 각기의 방식으로 성장해나간다. 그래서 드라마가 분류된 장르도, '미스터리', '범죄', '스릴러'이다.
<작은 아씨들>은 배우뿐만 아니라 쟁쟁한 스탭진의 이름으로도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헤어질 결심> 외 박찬욱 감독과 수많은 작품을 함께한 정서경 작가의 첫 드라마 작품으로도, 수준 높은 연출로 많은 이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김희원 감독의 차기작으로도 말이다. 그 외에도 박찬욱 사단 중 한 명인 류성희 미술감독, 역시 <빈센조>의 박세준 음악감독 등이 합류하여 매회 퀄리티 높은 미장센을 보여주고 있다.
근데, 원작소설 <작은 아씨들>에 따르면, 주인공은 세 자매가 아니라 네 자매여야 하지 않냐고? 아, 그마저도 드라마를 보다 보면 알 게 될 사실이다. 일단... 드라마를 봐라... 드라마를.
그 중에서도 가장 내 마음으로 동하게 했던 것은 바로 3화, 첫째 인주와 그의 고모할머니와의 독대 장면이다. 인경이와는 다르게 인주는 그동안 고모할머니와의 왕래가 없었던 것처럼 보여 궁금했던 찰나 등장한 장면. 돈을 쓰는 방법을 모르는 인주는 혈육 중 가장 많은 부를 축적한 고모할머니에게 찾아가 도움을 청한다. 고모할머니는 자기가 인주네를 도와야 하는 이유를 묻는다. 이에 인주는 이렇게 답한다.
우리 아기요. 왜 아기가 아프다고 말 안 했느냐고 우셨죠.
(...) 그런 할머니가 얼마 뒤에 인경이를 데리고 가셨어요.
죄책감이 아니면 할 수 없는 행동이에요.
그런데요, 할머니. 아파트 사는 거 도와주시면 다 해결될 거예요.
우리 세 자매 구김살없이 살아볼 거니까요.
사실 넷째였던 인혜 위에 셋째 형제가 있었고, 원작 설정과 마찬가지로 병약했던 셋째는 한국사회의 가난함을 이기지 못하고 끝내 죽고 만다. 그에 대한 고모할머니의 죄책감을 찌르는 장면이 명장면으로 꼽힐 수 있는 이유는, 그 말을 하고 있는 인주마저 표정에 죄책감이 묻어나기 때문이고, 결국 명확한 갑을관계처럼 보였던 처음 가족의 장면과 달리 인주와 고모할머니는 어딘가 빚을 져버린 똑같은 채무자의 입장으로 돌아간다.
드라마를 좋아하다 보면, 극본별로 꼭 제각각의 특색들이 살아있다. 어떤 드라마는 매번 이야기를 갈무리 지으며 등장하는 주인공의 독백이 좋았고, 어떤 드라마는 사회의 이면을 날카롭게 짚어주는 대사의 단어 선택이 좋았다. <작은 아씨들>에서 내가 주목한 건 바로 '대화'와 그로 발생하는 '텐션'이었다. 그야말로 대화를 한 번만 주고받는 장면이 있더라도 그곳에 꼭 인물 간의 이해관계, 그래서 발생하는 갑과 을, 갑의 눈빛과 을의 일그러진 입매를 모두 포함한다. 나에겐 이 '죄책감'을 말하는 장면이 그러했다.
다른 자매들 역시 인주만큼이나 매력적이다. 특히, 정말 꼭 맞는 옷을 입은 것처럼 연기하는 배우 남지현의 행보가 눈에 띈다. 당차지만, 본인이 갖고 있는 콤플렉스를 숨기기 위해 알콜의존증이라는 약점을 가지기도 한 둘째 인경은 항상 강할 수만도 없는 인물임에도 언제나 자신을 굽히지 않는 유능한 기자이다.
이런 역할에 남지현 배우를 대체할 수 있는 이가 과연 얼마나 될까. 항상 살짝 떨리는, 떨리지만 보다 더 날카로운 질문으로 상대방을 놓치지 않는 기자 인경의 눈빛을 띄고, 배우 남지현은 매화 빛나는 중이다.
특별출연이지만, 옆동네 드라마처럼 정말 '특별하게 출연해서 특별출연인 것인가' 되묻게 만드는 배우 추자현의 '화영' 역할도 매화 존재감을 뿜는다. 전작 드라마 <그린 마더스 클럽>을 아주 재밌게 본 나로선 첫화부터의 등장이 너무도 반가웠더라는.
최근 화영이 숨기고자 했던 비자금 700억의 행방이 조금씩 밝혀지면서, 화영이 주인공인 인주에게 아군이었는지 적군이었는지가 드라마 전개의 큰 화제가 되고 있다. 선과 악, 그리고 그 경계에서 줄타기를 할 수 있는 배우고 추자현이 뽑힌 것, 그리고 배우가 가진 탁월한 연기력이 드라마에서 큰 주목을 받고 있다는 것이 참으로 기쁘기만 하다.
정서경 작가는 원작 <작은 아씨들>과 자신이 각색한 드라마의 차이를 두고 '착하지만은 않은 미스테리함'을 꼽았다. 밝고 따뜻한 분위기의 원작 소설과 달리 그래서 세 자매들이 엮이게 되는 주변인물들은 어딘가 비밀을 품고 어두운 이면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그래서일까. 원작과 마찬가지로 (셋째 인혜를 제외한) 인주와 인경 또한 자신이 가지고 있는 문제에 함께 직면한 남자들과 대면한다. 드라마 덕질의 반절은 사실 내가 부여잡은 씨피에 대한 애정이기도 한 것이기에, 공식 커플 하나 없지만 모든 커플을 모두 공식처럼 먹게 하는 이 드라마의 개연성과 인물 설정은 나를 들뜨게 하는 것 같다. (참고로 이 글을 쓰고 있는 흰지는 700억을 눈 앞에 두고 공조 아닌 공조를 벌이고 있는 도일과 인주를 아주 눈여겨보고 있는 중이다.)
12부작의 법칙을 아는가? 타 드라마에 비해 짧으면 짧다 말할 수 있는 12부작이 사실은 16부작보다도 어쩌면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줄거리로 승부를 볼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설이다. 그리고 드라마 <작은 아씨들> 역시 12부작이다. 어제자 5화가 방영되고 곧 6화를 앞두고 있는 와중에, 반절까지 훌륭하게 달려와준 나의 덕질이 남은 6화도 실패없이 끝나길 바라는 마음 뿐이다. 그런 덕심을 담아 오늘 하루 열심히 글을 썼고, 나는 이제 다시 나에게 다가올 본방을 사수하며 즐기는 일만 남았다. "모두 작씨들 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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