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이 늦추위에 집에 콕 박히게 된 흰지다. 바로 얼마 전이 크리스마스였다. 코로나 이후 오미크론이라는 새로운 변형 바이러스가 뉴스 전파를 탔으니 연말 약속은 물 건너 갔고 기분이나마 내보자 싶어 평소에 보지 않았던 새로운 영상을 찾아보았다.
평소 구독하고 있었던 채널 '허챠밍'에서 연말 맞이 디너 요리와 먹방을 보고 '그래, 이거구나' 싶었다. 겨울 콘텐츠가 따로 있었을까? 강추위의 연말일수록 따뜻함과 여유로움을 느끼기 가장 쉬운 방법은 바로 맛있는 음식을 먹고 마시는 일일지니. 나의 구미를 당긴 건 다름아닌 6-7년 한창 '쿡방'의 붐을 주도한 요리 경연 프로그램이었다. 연말 맞이 요리 영상 하나를 본 것을 시작으로 나는 쿡방 트렌드에 힘입어 인기를 끌었던 예능들을 하나씩 정주행하기 시작했다.
2012년 4월 방영한 시즌 1을 시작으로 2016년 3월 시즌 4까지, 꽤 오랜 기간 사랑을 받아온 채널 올리브의 마스터 셰프 코리아 시리즈. 방영 당시 본방을 사수한 기억이 없는 내가 이 오래된 TV 시리즈를 다시 찾게 된 계기는 유튜브 알고리즘을 탄 시즌 2의 유명한 장면 영상 때문이었다.
제목은 ○○○으로 하겠습니다. 근데 이제 바질을 곁들인. 분명 어디서 많이 들어본 밈이었지만 그게 만화명대사겠거니 넘어가버렸지 실제 경연 프로그램의 참가자가 한 말인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름 마저 만화 주인공 같은 최강록 그는 대체... 밈의 명성에 걸맞게 그가 심사위원에게 올린 고추장 닭날개 조림의 비주얼은 감탄을 자아냈다.
그때였다. 내가 처음 요리 경연 프로그램에 다시, 아니 새삼 처음 눈길이 가게 된 것은. 드라마만 하더라도 제작한지 3년이 넘어가면 당시의 스타일링이나 최신 기기, 생활양식에게서 촌스러움을 발견하기 일쑤인데 음식 프로그램엔 그 촌티가 없었다. 멋진 음식은 시간이 지나도 그때의 음식 태를 유지한다. 의식주 중 가장 세월을 타지 않고 세련된 양식을 꼽으라면 그것이 과연 식(食)이구나.
경연대회에 '기승전결'이 있다면 개인적으로는 '전-결' 파트를 좋아한다. 보통의 경연 프로그램은 이색적인 참가자들이 눈길을 끄는 오디션 초반 장면이 주된 화제성을 이끌곤 하지만 나는 고된 미션과 잔인한 탈락제도를 거친 끝에 '겨우겨우 우격다짐으로 살아남은' 사람들 특유의 아우라를 사랑한다. 초반에 '엄마 나 TV 나왔어' 라는 들뜬 마음은 어느 정도 가신 상태에서 일정 부분 익숙해진 스튜디오에서 각자의 남은 실력을 쥐어짜내는 모습은 또 다른 열정과 불꽃을 튀긴다.
시즌 4의 '최고의 밥상차리기' 미션 또한 마찬가지였다. 시즌 4의 특성 상 탈락미션을 제한 나머지 미션에서 심사위원들은 굳이 모든 참가자들의 음식을 맛보지 않는다. 아마 조리 과정이나 요리사의 브리핑에 따라 보장된 음식 퀄리티 또한 심사 기준에 들어가기 때문이리라.
그 과정에서 본인의 모든 역량을 쏟아낸 음식을 평가해주지 않는다는 불평 또한 당연히 등장한다. 내 눈길을 끈 것은 그럼에도 심사위원들에게 선택받은 참가자들이 밥상을 차리는 그 과정이었다. 거창한 승리가 아닐지라도 '이번 미션 만큼은 꼭 통과해야 한다'는 간절한 바램 앞에서 참가자들이 뿜어내는 열정도 좋지만 나는 이 밥상을 차리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요리에 대한 사랑을 다분히 느꼈달까.
화려하고도 치열한 오디션 현장과는 다르게 이 밥상에서 중요한 것으로 꼽히는 것ㄱ은 화려한 반찬도, 향토적인 플레이팅도 아닌 그 상에 함께 차려진 반찬의 맛을 돋울 수 있는 밥이었다. 충실한 기본기. 모든 맛의 바탕이 되는 베이스.
김지희 참가자가 갓 지어진 밥에서 올라오는 냄새를 '밥향'이라 칭했을 때, 아차 싶었다. 세상에 내 주변에서 그 밥을 갓지은 냄새를 향이라 칭하는 사람은 없었는데. 아 이것이 음식을 사랑하는 사람에겐 향기로구나. 향기란 꼭 꽃에서만 나는 건 아니구나. 뒷통수를 한 대 맞은 듯한 느낌이었다.
그 에피소드의 승리자는 누구인지, 이 글을 읽은 이 중 흥미가 가는 사람이 있다면 직접 확인해보길 바란다.
요리 경연대회 프로그램의 원조. <한식대첩> 시리즈를 빼놓고 얘기하긴 섭하다. 위의 <마셰코>와 마찬가지로 채널 올리브에서 만든 요리 서바이벌 TV쇼 <한식대첩>은 2013년 9월 시즌 1을 시작으로 2018년 11월 시즌 4 이후 외전격인 고수외전 편까지 역시 당시의 쿡방 대세를 따라 많은 인기를 끈 예능 시리즈이다.
<마셰코>가 치열한 도전자들의 패기와 열정을 강조한 프로그램이라면 <한식대첩>의 도전자들이 갖고 있는 역량의 농도는 그들과 또 사뭇 다른 느낌이다. 전국 팔도의 '음식 장인'들이 모여 이미 자격을 갖춘 능력자들이 어디까지 역량을 펼칠 수 있나를 보여주는 멍석과도 같은 프로그램. 그래서일까, 100인의 오디션을 거쳐 참가자들의 자질을 1차적으로 살펴보는 <마셰코>의 초기 과정을 <한식대첩>은 내정된 참가자들의 이력을 죽 읊고 그들의 경력을 논하는 장면으로 대체하는 듯한 연출을 보여준다.
개인적인 취향이 반영된 탓일까? 이번에도 나는 밥과 반찬이 어우러진 한상의 손을 들었다. 허영만의 만화 <식객> 올챙이 국수 편의 실제 주인공이란 독특한 이력으로 눈길을 끈 시즌 3의 강원도 팀. 투박하고 소박한 강원도의 대표 식재료로서 '곤드레 나물'을 꼽아와 다른 지역의 일품 재료들과는 사뭇 다른 길을 가는 듯 보였다.
비장의 무기인 도끼를 들어 직접 갈비 정형에 나선 팀이 있는가 하면 집안에서 내려온 고서를 가져와 옛 음식을 그대로 구현해놓은 팀, 그 사이에서 밥과 여러 종류의 반찬에 모두 곤드레나물을 넣어 한상을 차리는 강원도팀의 요리 과정은 그렇게까지 화려함이나 튀는 매력을 보여주지는 않았다.
다른 참가자마저 메뉴의 무난함에 난색을 표현하고 있을 동안, 심사위원들이 잠시 심사를 잊고 식사를 하는 장면을 잠시 볼 수 있었다. 토속적이고 지역의 맛을 잘 살려낸 나물 한상이 화려한 조리과정을 거친 쟁쟁한 음식을 이겨낼 수 있을지, 비록 여기에서 이야기하긴 힘들지라도 과연 시즌 2-시즌 3를 통틀어 가장 최고의 밥이라 평가를 받은 이 한상이 유독 기억에 남았던 것 같다. 요리 과정 중 다른 팀의 화려하고도 이색적인 조리 과정과 요리를 지켜보는 것은 덤이다.
사실 나는 <냉부해>가 한창 인기를 끌고 있을 당시에 그렇게 주의깊게 프로그램을 시청한 적은 없었다. 대체적으로 쿡방이라는 주제에 주의가 끌리지 않았던 탓이었다. 요즘 내가 연말 분위기에 힘입어 다시 요리 프로그램들을 열심히 뒤적이고 있을 때, 아 이런 프로그램도 있었지 라며 다시 꺼내보기 시작한 것이 바로 이 <냉부해>였다.
<냉부해>에선 반드시 붙어야 커리어가 연장되는 미션도 없고 미션에 졌다고 해서 역시 그들의 커리어가 좌절하는 위험부담 또한 없다. 대신에 그 자리엔 투엠씨 체제의 '티키타카'식 진행과 제한 시간 내에 자신의 아이디어를 구현하는 속도전, 웬만한 예능인 못지 않은 캐릭터를 가진 출연진 셰프들까지 여러 예능 요소들이 들어차있다. 오히려 겉보기에 재미만 있는 듯한 조리 과정에서 오랜 기간 숙련된 노하우와 새로운 아이디어를 발견하기도 한다.
방송 1주년, 어쩌면 냉부해의 전성기를 달리고 있었던 53회가 특히 눈길을 끈 것은 첫번째로 셰프 출연진이었던 김풍 작가의 냉장고였다.
어쩌면 일상 속에서 너무 당연하게 존재하기에 사소하게 지나칠 수 있는 냉장고라는 아이템은 <냉부해> 1주년 특집에서도 김풍의 캐릭터를 설명해주는 단연 독보적인 아이템이었다. 생각보다 유통기한이 많이 지난 재료들로 의외의 웃음을 준 냉장고에 비해, 방송 속의 묘사처럼 수입 상가를 방불케 하는 실온재료들 또한 요리사의 부엌을 엿보는 재미를 준다.
그리고 1주년 특집으로, 요리사의 냉장고로부터 출발한 재료들이 손봐지는 크로스 매치에서 우리는 서로의 요리 스타일을 맞바꾼 팀이나, 기존의 양식과 중식 스타일을 맞바꾼 팀 등 기존의 <냉부해> 셰프들의 캐릭터들을 파악하고 있다면 더욱 더 재밌게 볼 수 있을 만한 요소들을 마주할 수 있다. 특히나 중식의 대가 이연복 셰프와 양식을 베이스로한 샘킴 셰프가 서로의 분야를 맞바꾸어 요리하는 장면에선 이연복 셰프가 중식 스타일로 파스타 요리 전 파기름을 낸다던가 하는 장면들은 웃음과 흥미를 동시에 유발하기도 한다.
그래서일까. 시원한 배춧국과도 같은 포스를 풍기는 카르보나라는 음식에 미숙한 나 조차도 레시피를 보며 따라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만큼 성공적이라는 평을 받는다. 예능이라는 본질에 스스로 충실하고 그보다 더 요리에 충실한 셰프들의 요리 향연은 지금 봐도 촌스러울리 없다. 아니, 오히려 단 한발자국도 나가선 안 되는 (물론 비유적인 표현이다) 지금 이 시국의 연말에 어쩌면 가장 적합한 콘텐츠일지도 모른다.
최근 내가 쿡방 예능을 정주행하도록 만들었던 요리사 최강록이 유튜브 채널을 운영한다. 최근까지도 눈이 즐거운 레시피 영상을 올리고 있으니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방문해보길 추천한다. 그 때 그 시절(이라고 할만큼 몇 년씩이나 지나버린 시기의) 요리사들의 열정을 현재진행형으로 목격하기도 한다. 아 그 경연 프로그램에 참가했던 사람이구나, 하고 인스타에서 종종 마주할 때마다 여전히 요리를 사랑하는 그들의 열정에 감탄하곤 한다. 그리고 배고 차오르고 눈도 풍족해진 나 또한 그곳에서 열정을 배운다. 달궈진 팬만큼이나 뜨거운 쿡방. 익숙한 듯 신선한 콘텐츠를 다시 골라보고 싶다면 자신있게 쿡방 예능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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