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가 든다는 것은 어쩌면 점점 감정에 무뎌지는 것이 아닐까.
어릴 적에는 축하할 일도, 기뻐할 일도 참 많았다. 생일은 말할 것도 없었고, 하물며 남의 생일인 크리스마스조차도 인륜지대사 마냥 반드시 챙기곤 했다. 살아온 날이 많아질 수록 기념일은 늘어만 가는데. 이상하게도 그 기쁨이나 감동은 점점 더 시원치 않다. 예컨대, 누구보다 기뻐야 할 생일조차도 ‘아, 맞네. 생일이었지’라며, 대수롭지 않게 넘기고 마니까.
매년 뜻 깊게 챙겨왔던 기념일들이 어느 순간부터 좀 시시했다. 점점 감흥이 없다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이겠다. 그래. 이렇게 무뎌지는 거겠지. 기념일에 대해서 쓰기로 했는데, 도무지 내 기념일 중에는 이렇다 할만한 게 없더라.
그래서 밖에서 찾기로 했다. 남들은 어떤 기념일을 보내는지. 다른 이의 사소하지만 특별한 기념일을 소개한다.
너의 데뷔를 축하해, '데뷔 기념일'
내 친구 A는 오랜 시간 한 아이돌 그룹을 좋아해왔다. (참고로 오즈앤엔즈의 다른 필진 ‘이내’는 아니다.) 그녀의 팬심은 고교시절부터 시작했다. 그때도 몇 푼 되지 않는 용돈을 모으고 모아 콘서트에 가거나, 각종 굿즈를 사 모았다. 대부분의 팬질이 그렇듯. 어느 정도 나이가 지나면 그녀 역시 열정적인 팬질을 자연스럽게 그만둘 줄 알았지만 여전히 식지않고 진행중이다.
그런 그녀가 당연히 잊지 않고 챙기는 기념일이 바로, 그녀가 사랑하는 아이돌의 데뷔 기념일이다. 데뷔 날짜에 맞춰 행사가 있다면 당연히 참석하겠지만. 행사가 없는 경우에는 데뷔기념일을 보내는 그녀만의 축하 방법이 있다.
친구 A의 아이돌 ‘데뷔 기념일’ 보내는 법
1. 기념일 몇 주전부터 유명한 수제 케이크 가게에 원하는 디자인의 케익을 주문한다.
2. 서울 근교를 중심으로 예쁜 숙소를 알아보고, 기념일에 맞춰 예약한다.
3. 기념일 당일, 주문한 케익을 찾아 예약한 숙소에 간다.(함께 팬질하는 친구가 같이 기념일을 보내기도 한다.)
4. 숙소를 파티 분위기로 꾸민다.
5. 함께 챙겨간 노트북으로 아이돌 음악을 무한반복으로 튼다.
6. 데뷔 년도를 계산해 알맞은 개수로 케이크에 초를 키고, 축하 노래를 부른다.(이때 기념 사진은 필수.)
7. 마지막으로 케이크를 먹으며, 좋아하는 아이돌 멤버가 나오는 영화나 드라마 혹은 예능을 정주행 한다.
찾아보니 팬들 사이에서는 이런 파티가 꽤나 익숙한 것 같다. 글보다는 사진이 더욱 이해하기 쉬울 것 같아서 열심히 검색을 해봤다. 다행히 분위기를 자세히 느낄 수 있는 블로그가 있어 첨부한다. (해당 블로그에 등장하는 수제 케이크 집은 내 친구 A도 자주 이용하는 곳이란다.)
그녀는 여러 사람이 함께하면 더 좋겠지만, 혼자서도 이 조촐한 파티가 즐겁다고 했다. 어떤 이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일지라도. 본인에게는 데뷔 기념일이 지친 일상에서 가끔씩 찾아오는 ‘활력소’라고 말하기도 했다.
한번은 그녀에게 “그러지 말고, 남친을 사귀어서 연애 기념일을 보내는 게 어때?”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녀는 나의 권유에 단호하게 대답했다.
“내 남친은 5명이야. 나 지금 기념일 보내는 건데?”라고.
그래. 친구야. 네가 행복하면 됐지. 너의 연애를 응원한다.
태어나줘서 고마운 나의 댕댕이, ‘반려견 생일’
회사 동료였던 B는 자칭, 타칭 ‘열혈 개 엄마’다. 세상에서 ‘단추(그녀의 반려견 이름이다.)'가 제일 좋다는 그녀는 결혼을 하지 않고, 평생 개 엄마로 살 계획이라고 했다. 그녀는 단추에 대해서는 뭐든 지극정성이었다. 간식이나 사료 역시 허투루 먹이는 법이 없었다. 성분, 제조일 등 꼼꼼하게 따져서 골랐다.
이런 그녀에게 반려견인 단추의 생일은 특별한 기념일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태어난 날이 아니라 그녀와 단추가 만난 날이다. 그녀는 매번 단추의 생일에는 수제 간식을 만들어주거나, 좋아하는 장난감을 사준다고 했다. 얼마전에는 단추 생일에 강아지 케이크를 손수 만들었다며 사진을 보여주기도 했다.
회사 동료 B가 애용하는 '단호박우유껌' 레시피
1. 단호박은 씨를 다 빼고 찐다.
2. 단호박이 알맞게 쪘으면 다진다.
3. 약한 불에 다진 단호박, 한천 가루, 우유를 넣어 끓인다.
4. 우유에 점도가 보이며 잘 섞어주고 굳힌다.
5. 굳은 단호박 우유를 개 껌 크기로 썬다.
6. 에어프라이어를 80도, 30분에 맞추고 두 번 돌린다.
7. 1시간 돌린 후에도 아직 단단하지 않다면 5분을 더 돌린다.
위 레시피는 인터넷에서 흔히 찾을 수 있는 대표적인 수제 간식 레시피라고. 본래 레시피는 건조기를 사용하는데 그녀는 건조기가 없어 에어프라이어로 대체 했다고 말했다. 만드는 과정이나 재료를 보면 사람이 먹어도 전혀 이상이 없다.
아래는 그녀가 올해 단추 생일에 열심히 만들었다는 강아지 케이트 레시피다.(참고로 해당 블로거는 이글과 관련은 없다. 회사동료B가 해당 블로그의 리시피를 이용했을 뿐.) 단추가 엄청 잘 먹었다며 뿌듯해 하는 그녀의 모습이 생각난다. 참 행복해 보였다. 부러울 정도로. 괜히 본가에 있는 나의 댕댕이에게 미안하기도 하고.
확실히 기념일은 일상에 특별함을 선사한다. 사람에 따라 기쁨이 될 수도, 슬픔이 될 수도 있지만. 매년 기억해야하는 날이 생긴다는 것은 경험과 추억이 쌓여가고 있다는 증거라고 생각한다. 즉, 기념할 것이 많다는 건 당신의 일생이 생각보다 행복하다는 것.
그러니 우리, 더 이상 무뎌지지 말자. 일상 속 약간의 활력을 위해서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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